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산함 사건 (문단 편집) ===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 ===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수사, [[쉬충즈]] 숙청 등을 통해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왔고 [[중국 국민당]]의 제일가는 군사 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동 동부의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동정에서 장제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천중밍을 완전히 축출했다. 장제스는 원래 국민당 좌파나 공산당원에게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고 쑨원이 연소용공에 찬성한다는 것을 알자[* 장제스 개인적으로는 소련 방문 이후 소련이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소련에 대한 불만을 품었다.] 연소용공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왕징웨이 집권에도 협조했다. 소련 고문들은 장제스가 '너무나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일부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국민당의 자코뱅파,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 덕에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집행위원회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제스는 [[펑위샹]]에 맞서 [[장쭤린]]의 [[봉천군벌]],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옌시산]]의 [[염계군벌]]이 연합하여 일으킨 [[직봉풍전쟁]]을 보고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이에 장제스의 북벌 주장을 반대했다. 그리고 장징장을 비롯하여 국민당 우파와의 관계가 상당히 돈독했고 서산회의파 제명에도 반대한 장제스의 성분을 의심하는 과격한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존재를 방해물로 여기고 장제스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북벌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은 수석 군사고문인 키산카[* 본명 니콜라이 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93~1938). 소련 건국의 주역이자 소비에트 지도부 중 한 명인 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88~1935)의 동생이다. ]로, 그는 노골적으로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제스를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했다. 북벌 문제와 키산카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3월에 들어서자 정치주임 교관 고어한이 황포군관학교가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우리 단체 안에도 한 사람의 [[돤치루이]]가 있다. 북방의 돤치루이를 타도하려면 먼저 이쪽의 돤치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월 3일, 장제스와 돈독하던 [[미하일 보로딘]]이 본국의 소환에 따라 귀국한다는 구실로 중국 북방으로 이동하고 적대적인 키산카가 소련 고문단장이 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3월 7일, 군교 교육장 덩옌다가 장제스를 비방하는 삐라가 등사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덩옌다는 공산당원으로 훗날 장제스와 대립하다가 장제스에게 처형되었다. 이 시기의 장제스를 음해하는 각종 선전, 선동에 대해서 중화민국 측은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장제스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이때 장제스를 노린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공산당의 갈등을 비롯한 정치적 난관으로 인해 장제스는 극도의 불안감과 피로를 호소하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었고 중산함 사건 직전에는 산터우로 가서 요양할 것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는 장제스가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린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